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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is the Cruellest Month. 4월은 잔인한 달.
무심코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햇살이 스며들어오고, 그 햇살에 봄의 향기가 어렴풋이 묻어나는 것을 느끼며
난 웬만한 사람들이면 흔히들 버릇처럼 중얼거리는,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이 쓴 그 시구에 절절히 공감하고 있었다.
내게도 봄이 오는 4월은 그토록 잔인했으니까.
매년 해가 바뀔수록 이상기후가 어쩌고 하는 통에 3월에도 눈이 올 정도로 계절이 불분명해졌지만,
그렇게나 질기게 버티던 겨울이 물러가고 나자 어김없이 화사한 꽃들이 만발한 봄이 또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아무리 내 영역 안에 봄을 들여놓지 않으려 해도, 끈질기게 침범해 오는 봄의 기운은 늘 그렇듯 내 심기를 자극했다.
“ 젠장. 지랄 맞은 봄이네, 또.”
잠시 식어버린 커피를 멍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흘러들어온 꽃향기로 인해 불편해진 심기는 말투로 여실히 드러났다.
투덜거림과 함께 커피 잔을 내려놓고 창문을 닫자, 소파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광고 포스터들을 뒤적이던 승호가 힐끔 곁눈질을 한 번 하더니 피식 웃음을 지었다.
“ 문희준.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서 봄이 싫으면, 넌 인생의 4분의 1을 손해 보는 거라니까.”
“ 그깟 4분의 1...차라리 버리고 말아. 아예 겨울이 끝날 때 잠들었다가 여름이 시작되면 깨어났으면 좋겠어.”
정말이지 봄이 싫어서 미쳐버리겠다고 아우성쳐대는 내 몸의 모든 세포들의 울림을 고스란히 느끼며
냉랭하게 내뱉는 내 말에 승호의 고개가 좌우로 내저어졌다.
“ 그렇게 싫으면 차라리 봄이 없는 곳으로 가버리지 그래?”
“ 봄이 없는 곳이...있을까?”
“ 북극 같은 데 가면 없지 않을까?”
“ 북극이라- 진짜 확 떠나버릴까.”
“ 모르는 소리. 북극에도 봄은 옵니다, 희준 형.”
조금씩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관자놀이를 손으로 지그시 압박하며 중얼거리는 말 뒤로,
승호의 것이 아닌 다른 목소리가 불쑥 끼어드는가했더니 곧 사무실 안으로 스륵
사람보다 먼저 두 팔 가득 안아든 꽃바구니가 들어서는 게 보였다.
그 모양새를 보고 승호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난 오히려 미간에 깊게 주름이 잡혔다.
이유는 바로 그 꽃바구니 위로 창밖의 봄 햇살처럼 밝게 웃는 얼굴이 내겐 그리 반가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
덧붙여 ‘북극에도 봄은 온다.’는 달갑지 않은 말이 함께라는 점 때문이었다.
“ 안칠현. 뭐냐, 그건.”
“ 헤헷. 어때요? 예뻐요?”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꽃향기도 싫어서 문을 닫아버린 내게
너무도 순진무구한 말투로 물어오는 저 ‘안칠현’이란 놈은 아무래도 내 표정 따윈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다.
정말 딱 더럽거나 위험한 물건 보듯이 녀석의 두 팔에 들린 꽃바구니를 보며
가까이 오는 만큼 슬쩍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는데 나를 위한 배려 같은 건 전혀 하지를 않으니.........
“ 하루 사이에 꽃집에 취직이라도 했어? 대체 그렇게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큰 꽃바구니는 어디다 써 먹자고 들고 온 거냐.”
“ 어디다 써 먹긴요. 형 기분 좋게 해 주는 데 써 먹죠.”
“ 꽃은 딱 질색인 거 잊어버렸나 보지?”
“ 꽃을 왜 질색해요? 난 이거 다시 잘 정리해서 형 책상에 놓으려고 했는데.”
“ 글쎄, 난 싫다고. 그러니까 놓지 마. 놓으면 비쩍 말려서 쓰레기통에 버릴 거야.”
“ 심술쟁이. 연약한 꽃이 무슨 죄가 있다고 말려서 쓰레기통에 버려요?”
한 마디도 지지 않으면서 성큼성큼 내 앞까지 다가온 녀석은
끔찍하게도 들고 있던 꽃바구니를 내 눈 가까이 턱- 들이댔다가 흠칫하는 내 반응을 보고서야
장난꾸러기 어린 아이처럼 씨익 웃으며 좀 떨어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 경고하는데, 집어던지기 전에 그거 그대로 다시 들고 나가.”
“ 치- 또, 또. 우리 겨울 씨 벌써 봄이라고 골났구나?”
마치 어린 아이 투정 받아주듯 대꾸하는 녀석.
그 말투가 기분 나빠 한쪽 눈썹을 씰룩거리며 미간에 주름을 잡자,
혀를 쏙 내밀더니 웃는 낯으로 아주 조금, 잘못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런 행동은 아무리 봐도 날 가지고 노는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리 탐탁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대거리하는 것도 괜한 짓인 것 같아 입을 꾹 다문 채 녀석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녀석은 잠시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것 같더니 곧 꽃바구니를 놓은 탁자 앞에 털썩 앉았다.
“ 형. 형이야말로 자꾸 잊어버릴 거예요? 이거 13년 전에 진 빚 갚는 거라니까요. 뭐, 빚 말고 은혜라고 해도 되고.”
“ 네가 은혜 갚는 까치라도 돼? 그래서, 머리 깨져서 죽을 때까지 종이라도 칠 셈이야?”
“ 그럼- 형의 겨울이 끝나요?”
아무렇지 않게 긍정하는 식의 답을 하는 녀석을 싸늘한 얼굴로 돌아봤다.
‘죽는다.’는 말이 내게 있어 어떤 의미인데.
그걸 알 만큼 아는 놈에게서 그런 대답을 듣는 건 속된 말로 기분 더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히죽히죽 웃는 상이라니.
정말 제 손바닥 위에 나를 올려놓고 살살 건드리며 노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날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건 바라지도 않지만, 그런 모순적인 말에 속을 정도로 바보도 아니다.
녀석이 내 속을 뒤집어놓을 작정이 아니고서야 어디 저런 말을 저리 쉽게 내뱉는단 말인가.
차갑게 노려보고 있자니 그런 내 마음을 알긴 아는 모양인지 녀석의 얼굴에서 웃음이 점점 옅어졌다.
“ 고집쟁이 겨울 씨. 또 표정 굳었다. 내가 또 금 밟았나?”
하- 아무래도 이 녀석은 적당히 능청스러운 것의 수위를 넘어선 녀석이다.
시선을 흩트리지 않고 응시하자 그 시선에서 벗어날 요량으로 꽃향기를 맡는 척 해댄다.
그 모습에 오히려 옆에서 지켜보던 승호가 풋- 웃음을 터뜨리더니 한 마디 내뱉는다.
“ 너희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것 보면 꼭 부부싸움 같단 말이야.”
“ 안승호. 너 자꾸 그딴 말로 저 녀석 부추기면 앞으로 사무실에 안 씨 성 가진 사람들은 못 들어오게 할 거야.”
“ 아아- 알았어, 알았어. 입 꼭 다물고 있으란 소리지? 알았으니까 표정 풀어라. 괜히 누구 옆에 있다가 돌 맞긴 싫다고.”
말을 해도 들어먹지 않는 녀석 대신 애꿎은 승호에게 더 싸늘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항복의 뜻이라도 되는 듯 두 손을 들고선 대꾸해온다.
물론 속으로는 ‘왜 괜히 나한테 난리야.’라는 소리를 해대고 있을 게 뻔하지만,
안승호는 누구처럼 내 앞에서 그걸 입 밖으로 내뱉을 만큼 담이 큰 녀석은 아니었다.
그런 녀석을 보며 한숨을 짧게 내어 쉰 뒤, 자리에 앉으려고 의자를 뺐다가
아무래도 좁은 공간 안에 꽃과 안칠현, 두 거북한 존재와 함께 있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
식어서 별 맛 없는 커피가 든 잔을 들고서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나를 따라 시선을 옮긴 승호가 의아한 표정과 함께 질문을 던져왔다.
“ 어디 가냐?”
“ 저 녀석, 꽃이랑 같이 사라지고 나면 연락해.”
“ 설마 너 지금 칠현이 피해서 도망간다는 소리야?”
“ 그래.”
“ 이야- 아무리 어렵고 무서운 상대 앞에서도 도망가는 일 없는 문희준이 진짜 안칠현을 피해 도망간다고?”
“ 그런 게 즐거우면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쭉 즐기시든가.”
눈동자 가득 ‘재미있어. 즐거워.’를 새기고 있는 승호를 보며 탐탁지 않게 대꾸하고 문을 탁 닫는 순간
얼핏 마주친 안칠현의 눈빛이 조금 서글픈 기색을 띤 것은 그저 내 기분 탓이라 치부하고 냉정히 돌아섰다.
내가 기억하는, 그 녀석과 내가 함께 보내온 시간 중에 녀석이 그런 표정을 잊고 산 시간이 벌써 10년은 된 것 같으니까.
그런데 새삼스레 서글픔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 감상이 지나치다.
그래서 괜한 망상이라도 떨치듯이 고개를 젓고는 사무실 앞을 벗어나긴 했는데, 발걸음을 옮기려고 생각하자 또 막막했다.
밖으로 나가자니 그 끔찍한 봄의 기운을 온몸으로 맞아야겠고, 봄을 피하자니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상황.
어쩔 수 없이 식어버린 커피 대신 새 커피라도 내릴 요량으로 다용도실로 향했다.
커피머신에서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좁은 공간 안에서 그나마 평온을 되찾은 나는 벽에 기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쯤 이 지독한 봄의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직 마음 한 구석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떠난 그에 대한 기억이 조금 희미해질 즈음-
아니면, 그를 사랑했던 내 감정이 결코 죄가 아님을 인정받게 되는 날- 정도일까?
그것도 아니면 3년 전의 맹세를 후회할 만큼 나를 뒤흔드는 누군가를 다시 만나면-일까?
훗- 생각 끝에 작은 자조적인 웃음이 흘렀다.
“ 그래도 이겨내고 싶기는 한 거냐, 문희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지금 이 상황을 괴롭게 느끼고 그 괴로움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유약한 인간의 이기심이 내게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저절로 비웃음이 지어졌다.
그를 묻고 돌아오며 다시는 평범한 행복이나 평온함 같은 건 꿈꾸지 않으리라 속으로 다짐했는데.
그런 것은 절대 내가 가질 수 없는 허황된 꿈이라는 걸 알았는데,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이래서야 내가 보낸 3년은 속죄의 시간도 뭐도 아닌 게 되질 않나.
쓰게 웃으며 어느새 잔을 가득 채운 커피를 들고 다시 다용도실을 나와 옥상에라도 올라가 볼까하고 발걸음을 향했다.
하지만 열린 문 밖으로 드러난 광경을 마주한 순간, 발길을 다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잊고 있었는데 사무실이 있는 빌딩 옥상에는 친환경 건설이니 뭐니 해서 정원이 멋들어지게 꾸며져 있어서,
한 발 내딛기만 하면 그야말로 봄의 한가운데에 맨몸으로 서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다.
사무실이 꽤 높은 층이라 바깥 풍경은 잘 내다보이는 탓에 웬만해선 옥상까지 올라오는 일이 자주 없었더니, 그새 잊은 모양.
한숨을 길게 내쉬며 또 발걸음을 돌린 난 그저 사무실 안에 있는 게 그나마 나으리란 생각에
불청객인 녀석을 쫓아내어 버릴 심산으로 다시 사무실에 내려갔다.
아직 사무실을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녀석이 나갈 때 연락하라고 했는데 연락은 오지 않았으니
그 끔찍한 꽃과 함께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 녀석을 어떻게 내쫓을까- 나름 비장하게 고민하면서.
사무실 앞에 도착해 살짝 열린 문틈으로 살펴보니 그 사이 녀석은 정말 그 꽃을 내 사무실에 장식이라도 하려는 건지
아예 꽃들을 바구니에서 꺼내 탁자 위에 주르륵 늘어놓고는 옆에 꽃병까지 준비해놓고 꽃을 고르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어찌나 정성스러운지, 내 책상에 기대 선 채 그런 녀석을 내려다보고 있는 승호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너 진짜 희준이 고문하는 거지?”
“ 내가 왜요?”
“ 어디를 보나 지금 그 녀석에게 너의 행동은 독약일 것 같다만.”
“ 이게 독약이라면, 난 지금 적응훈련을 시키는 중일걸요?”
“ 적응훈련이라고?”
승호의 되물음에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씩 웃었다.
“ 두려워하는 것, 싫어하는 것에 맞부딪치는 것도 하나의 극복방법이잖아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일종의 내성을 키우는 거죠.”
아무렇지 않게 생긋 웃으며 대꾸하는 그 목소리는 참 해맑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쪽에선 정말 ‘저 자식 사이코 아냐?’라는 물음이 번뜩 떠오르는데.
그래도 차마 말로 하기는 껄끄러워 입은 꾹 다물었다.
저가 무슨 새끼를 교육시키는 어미 사자도 아니고, 어미 독수리도 아니면서 ‘내성을 키우기 위해 독약을 붓는다.’라-
어이없음에 웃음이 새어나오는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승호 역시 허탈하게 웃었다.
